그
밖에 병조, 이조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이항 부자등이 돋보인다
조선
인조 때의 이사용(李士龍 )은 명과 청이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그는 청의 강요로 조선이 명을 치는데 합세했을 때 출전했으나
명나라에
대한 옛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올곧은 선비로 당시
그는 포사(砲士)였으나
그는;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군사를
어찌 공격
하겠느냐"며
끝까지 포쏘기를 거절하다 처형당했다.
그가 숨지자 청나라 태종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그의 유해를 조선으로 돌려보내
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사도 세자의 호위무관인 이석문(李碩文)은 고향에 낙향해 자기집
북
쪽에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녘을 향해 매일같이 재배했던 절신이다
【집성촌】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행정구역상의 지명보다 한개(韓開) 마을로 더욱 알려진
성산이씨의 아성이다.
입향조는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냈던 이우(李友). 그가 조상대대로 살아온 성주읍
한개마을로 이중한 내력은 확실치않다.
다만 조선초 영남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던
서주목(星州牧)에 역사가 들어서고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득실거리자성주는
체통있는 양반이 살곳은 못 된다"
고 해서 문중의 묘를 한 개마을로
옮겼다는얘기가 전해내려올 뿐이다
아직도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를 보존하며 5백년 유가(濡家)의 가풍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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