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山李氏 유례 

유래】시조 이능일(李能一)은 고려개국공신으로 신라말엽(현 성주군) 일대를 통치해온

         호족이었다.

         그는 12년동안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수훈을 세웠다.그의 원래의 이름은

         능(能) 또는 능필(能弼)이었는데 고려태조가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통일을 상징하는 일(一)자를 내려 능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고려건국후 태조왕건의 딸인 정순궁주(淀順宮州)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굴림">(司空, 정1품)에 이르고 성산백에 봉해 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성산은 조선시대에 지명이 성주로 바뀌어 성주를 본관으로하는 성주이씨나 성산

         이씨 (광평이씨)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뿌리 부터가 다르다.

 

【 가문의 번영】고려 초기 이견수(李堅守)는 이광(李匡)과 이직(李直)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5부자가 모두 과거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이후 정당문학과 종2품에 오른

         이우당(李宇唐),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이여충(李汝忠),금산 군사 (郡事)를

         지낸 이여신(李汝信), 안염부사(按廉副使)를 지낸 이여양(李汝良)등이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조선초기에는 중종때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지낸 이세인(李世仁)은 연산군때 직언

         으로이름난 명신이었다.

         그는 사간으로 있을 당시 간신배를 탄핵하다 나주로 유배되는 등 전후 두차례에

         걸쳐 귀향길에 오르는 시련도 겪었다.

        그 밖에 병조, 이조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이항 부자등이 돋보인다

        조선 인조 때의 이사용(李士龍 )은 명과 청이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그는 청의 강요로 조선이 명을 치는데 합세했을 때 출전했으나

        명나라에 대한 옛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올곧은 선비로 당시

        그는 포사(砲士)였으나 그는;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군사를 어찌 공격

        하겠느냐"며 끝까지 포쏘기를 거절하다 처형당했다.

 

        그가 숨지자 청나라 태종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그의 유해를 조선으로 돌려보내

        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사도 세자의 호위무관인 이석문(李碩文)은 고향에 낙향해 자기집 북

        쪽에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녘을 향해 매일같이 재배했던 절신이다

 

【집성촌】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행정구역상의 지명보다 한개(韓開) 마을로 더욱 알려진

        성산이씨의 아성이다.

        입향조는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냈던 이우(李友). 그가 조상대대로 살아온 성주읍

        한개마을로 이중한 내력은 확실치않다.

 

        다만 조선초 영남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던 서주목(星州牧)에 역사가 들어서고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득실거리자성주는 체통있는 양반이 살곳은 못 된다"

        고 해서 문중의 묘를 한 개마을로 옮겼다는얘기가 전해내려올 뿐이다

        아직도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를 보존하며 5백년 유가(濡家)의 가풍을

       잇는다.

出處 : 星山李氏  三十五代 孫   Lee  Sang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