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손글씨                                                                f:/손글씨/

기원전 4000~3000년 인류 최초의 문자가 태어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선 필경사(筆耕士)가 특권층이었다. 필경사는 갈대 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만든 펜으로 쐐기처럼 생긴 문자를 진흙판에 새겼다. 왕의 말씀을 적거나, 일반인 상거래와 재산 기록을 도맡았다. 당시 진흙판에 새겨진 '필경사 견습생 모집 광고'를 해독했더니 '필경사는 일반 노동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서양에선 15세기 중반 인쇄술 등장과 함께 50년 만에 3만종이 넘는 활자 책이 쏟아져 나와 필사본을    제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양에선 서예(書藝) 시대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문열 소설 '금시조'는 붓    글씨를 둘러싼 스승과 제자 사이 예도(藝道) 논쟁을 다뤘다. 스승은 글씨의 바탕이 눈에 안 보이는 도    (道)에 있다고 하지만, 제자는 겉으로 아름답게 드러난 예(藝)가 더 중요하다며 팽팽하게 맞선다.

▶프랑스 공영 TV는 1986년부터 2005년까지 20년 동안 전국 받아쓰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해마다 초·    중·고생 40만명과 성인 15만명이 지역 예선을 거친 끝에 파리에서 결선을 치렀다. 결선에서 진행자는    옛말과 전문 용어, 유행어가 뒤섞인 문제를 냈다. 행사장에 초청된 문인과 학자도 정확하게 받아쓰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까다로웠다.

▶엊그제 미국 인디애나주 교육부가 초등학교에서 '키보드 타이핑'을 필수과목으로 정했다. 그러면서    필기체 손글씨 교육은 선택과목으로 돌려 사실상 중단하기로 했다. "손글씨 교육은 디지털시대 아이    들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손글씨 교육 포기는 인간 정신의 디지털 종속을 가속    화한다"는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영국에선 '글씨가 엉망인 어린이일수록 학업 성취도가 낮    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요즘 우리 초등학교에서도 손글씨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컴퓨터 자판의 편리함에 맛 들인 아이    들이 굳이 힘들여 반듯하게 글씨를 쓰려 하지 않는다. 서울 한신초등학교는 40년 넘게 인성교육 삼아    전교생에게 글씨 쓰기를 가르쳤더니 아이들이 차분해지고 사고력도 좋아졌다고 한다. 손글씨는 손과    두뇌가 함께 움직여 기억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놀이가 아닐까. 종이 위에 사각사각 연필심 움직이는    소리만 나는 교실, 그 평온 속에 빠진 아이들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