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선 예금 명의자만 예금주"

대법, 판결, 임직원 명의로 회사 자금 분산예치 관행 사라질듯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2009년 3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19일 "금융실명제하에서는 예금의 명의자만 예금주로 인정해야 한다"며 차명계좌의 예금주에 대한 기존 판례를 깨뜨렸다.

이는 차명계좌에 돈을 제공한 실소유주가 누구이든 해당 계좌의 명의를 가진 사람만 예금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돈을 댄 사람이 예금주로 인정받고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예금주로 인정받지 못하던 기존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임직원 명의로 회사 자금을 분산 예치시키는 관행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은 다만, 금융기관과 계좌의 실소유자가 "명의자 대신 실제 주인이 따로 있다"는 명시적인 이면계약서를 작성한 경우에 한해서 계좌의 실소유자를 명의자 대신 예금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경우 해당 금융기관과 그 임직원들이 금융실명제법 위반으로 처벌받게 돼 있기 때문에 누군가 명의를 빌려준다고 하더라도 차명계좌를 손쉽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판례 변경에 따라 차명계좌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를 두고 분쟁도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기업이 차명계좌에 넣어둔 돈을 명의를 빌려준 임직원이 몰래 빼냈을 경우 '타인의 재물'을 빼돌렸다며 횡령죄로 사법처리됐다.

하지만 이제는 새 대법원 판례에 따라 차명계좌의 돈이 '타인의 재물'인지 불분명해지면서 법적 다툼이 예상된다.

가족 간에 만든 차명계좌도 불화가 있을 때는 분쟁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 명의로 만들어둔 계좌에서 아내가 돈을 꺼내 썼을 때 돈의 주인이 누구냐를 두고 다툼이 생길 수 있다.

새 판례는 19일 선고와 동시에 효력이 생겼다.

따라서 실소유주가 명의를 빌려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할 것 같으면 차명계좌를 빨리 실명화하는 게 현명하다.

[사설] "실제 돈 주인보다 명의 빌려준 사람이 통장 주인"

   2009년 3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일 "남에게 명의만 빌려준 차명(借名)계좌라 하더라도 실명 확인 등 적법(適法) 절차를 지켜 금융회사에 돈을 맡겼다면 그 돈의 소유권은 예금 명의자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금융회사와 실제 돈 주인이 '예금 소유권이 예금 명의자가 아닌 실제 전주(錢主)에게 있다'고 명시적으로 합의하는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돈 주인을 예금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법원은 1993년부터 시행된 금융실명제(實名制)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돈의 실제 주인을 예금주로 인정해 왔다. 예금 명의자가 누구냐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던 금융거래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많은 기업과 정치인들이 알게 모르게 남의 명의를 빌려 거액의 재산을 빼돌리거나 비자금을 만들어 관리해왔다.삼성 비자금사건만 해도 삼성 전·현직 임원 명의로 차명계좌 1199개를 열어 거액의 재산을 쪼개서 넣어둔 사실이 특별검사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었다.

 일반 서민들도 5000만원까지인 예금 보호 한도와 3000만원까지인 금융상품 비과세 혜택을 받기 위해 가족·친척·친구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돈을 나눠 맡기는 식의 편법적 재테크를 해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차명계좌를 관대하게 보아오던 법원의 관행에 스스로 제동을 걸고, 모든 금융 거래는 본인 실명으로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 취지를 재확인했다. 현실적으로 실효성에 문제가 많았던 금융실명제를 비로소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한 불법·편법 자금 운용이 어렵게 됐다. 돈이 누구 소유라는 이면계약서나 합의서처럼 명백한 근거가 없을 경우 전주와 예금 명의자 사이에 법적 분쟁이 잦아질 소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직원 이름의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해오던 기업들은 이름을 빌려준 직원이 자기 돈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경우를 생각해 당장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이제 세금을 덜기 위해 음성자금을 차명계좌에 쪼개 넣어 두던 관행을 그만두고 모든 자금을 정당한 세금을 물고 양성화해야 한다는 자각을 할 때가 됐다.정부도 대법원 판결을 부정한 자금 조성과 편법 투자 통로로 이용돼온 차명계좌를 정리하고 사회에 투명성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려면 이해당사자 간 법적 분쟁에 대비해 관련 법을 정비하고, 차명거래를 눈감아주거나 부추겨온 금융회사에 대한 처벌 규정도 강화해 금융실명제를 새로 출발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