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침탈 막으려 썼던 '고종황제 국새' 찾았다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2009년 3월 10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고종 황제의 국새(國璽·사진)를 100년 만에 되찾았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고종이 1903년 이후 러시아·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보낸 친서(親書)에 사용한 '황제어새(皇帝御璽)'를 지난해 12월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다"며 공개했다.

고종의 국새는 외함(보록)은 분실됐고 내함(보통·寶筒)만 남아 있으며, 높이 4.8㎝,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보뉴·寶紐)는 거북이 모양이고, 붉은 비단실로 짜인 끈(보수·寶綬)이 달려 있다.

한 변이 5.3㎝인 정사각형 인장면(印章面)에는 '皇帝御璽(황제어새)'라고 돋을새김(양각)돼 있다.

조선왕조 500여년간 수많은 국새를 사용했지만 실제 사용한 국새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위 글을 읽고 난 후기 : 그 속의 의미는 잘 몰으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 남겨 놓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신대우검사소장 : 이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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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국새, 어떤 용도로 쓰였나

고종은 여러 국새를 썼지만 이번에 나온 국새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만큼 은밀하게 쓴 것이라서 고종의 혼과 한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김현경 기자가 전합니다.


비운의 나라, 비운의 황제.

고종은 황제의 상징인 국새조차 비밀리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해 간 을사조약 체결 두 달 뒤인 1906년 1월.독일 황제에게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줄 우의를 기대한다' 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며 바로 이 비밀 도장인 '황제 어새'를 찍었습니다.

이탈리아 군주와 프랑스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에도 역시 '황제 어새'가 선명하게 찍혀있습니다.

이건무 청장/문화재청 "당시 대한제국의 힘든 상황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가 은밀히 사용한..."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13종류의 국새를 만들었지만 이 '황제 어새'가 만들어진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크기가 작고, 내함에 인주를 담는 공간도 있어 상서원에서 관리했던 다른 국새들과는 달리 황제가 직접 소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휴대용 비밀 도장까지 만들어 강대국들에게 친서를 보낸 건 일제에게 철저히 감시당했던 황제의 필사적인 외교 노력이었습니다.

이태진 명예교수/서울대 국사학과 "피나는 외교투쟁을 벌인 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다시 되찾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제 나라를 빼앗길지 모르던 구한말, 대한제국을 지키려던 고종의 절박함이 이 작은 국새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MBC 뉴스 김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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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26대 고종 (高宗,1852~1919. 1. 21 )의 아명은 명복(命福) , 초명은 재황(載晃) ,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왕실 예법에 따라서 이름(諱)은 외자로  형(熙←灬를 빼고 火)이라고 했습니다.

※아명(兒名) - 어린 아이 때의 이름으로 자라서 어른이 되면 저절로 불리지 않게 되는 이름을 말하며, 장성하여 관례(冠禮) 즉, 성인식(成人式)을 치르기 전까지 부르는 이름입니다.

아명과 초명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어지나 굳이 차이를 따지면 아래와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명은 주로 천한 것을 빗대어서 지었는데, 이는 무병장수를 기원하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주로 양반들의 경우가 이러하였으며, 서민들은 이 아명을 그대로 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초명(初名) - 초명의 경우 아명보다는 꽤 순화(?) 된 것으로 주로 한자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이가 출생하면 그 집안의 항렬자에 따라 지은 이름을 말합니다.

그런데 휘(諱)에 대해서 일단 ' 형' 으로 부르는 것은 맞는데 문제는 그것을 어찌 쓰고, 보느냐가 문제이지요.

우리들이 지금 보고있는 컴퓨터의  백과사전에도  '희' 라고 나와 있는게 현실이니까요...

광무원년(1897년) 9월 21일에 작성된 프랑스대통령에게 보내는 고종(대군주)

의 친서인데, 여기에는 '군주어새(君主御璽)' 위에 고종의 이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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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발(灬)'과 '불화(火)'는 당연히 대체 통용되고 당연히 그 발음도 같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위의 경우에는 '불화발(灬)'을 적었을 경우와 '불화' 받침(火)이 각기 다른 발음이 나오는 것으로 확인된다.

우리가 흔히 '희(熙)'라고 읽은 글자는 여기서도 허기절(許其切)이라고 하여 'ㅎ+ㅣ= 히'로 읽거나 '허의절(許宜切)이라고 하여 'ㅎ+ㅢ=희'로 읽는다고 되어 있다. (다만 옛글자의 모양이 '불화발(灬)'이 아니고 '불화(火)'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나, 이것 역시 고종의 이름과는 별개의 글자인 듯하다.)

그런데 왼쪽 부분에 표시된 글자(즉 불화(火)받침글자를 보면, "음(音)을 형(逈)"이라고 하여 별개의 발음이 나는 것으로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고종의 친서에 표시된 이름은 바로 이 글자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물론 엄밀하게는 출판물에 따라 삐침부분이 더 있는 경우도 있고, 삐침부분이 없이 '희(熙)'모양에다 받침부분만 화(火)로 바뀌어져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옛사람들의 이름은 확실히 그 정확한 소리값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더구나 임금의 이름은 피휘(避諱)의 영향탓도 있겠지만, 일반인들이 거의 사용할 가능성이 없는 글자를 골라내어 이름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더더욱 이런 일이 많이 많이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정확한 한자 표기에 따르면 고종의 이름은 '이희'라기보다는 '이형'이 되어야 할 것이나 정확하나 실제의 용례에 있어서는 '형'의 소리값이 반드시 맞았던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표기하는게 맞는지  아직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distorted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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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학회월보 > 1909년 6월호에 수록된 '황통일람 (皇通一覽)' 이라는 자료인데,여기

에 당시 태황제 ( 太皇帝 ) 인 고종의 이름을 표시해놓은 부분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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