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통감〉 여덟 권을 읽었을 무렵 해서는 책상머리보다는 집안을 드나드는 포군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내닫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모셔온 독선생과 부모가 엄하게 나무랐으나 중근은 꿋꿋하게 버티며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제법 선비 티를 내가고 있던 벗과 동학(同學)들이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며 간곡히 타일렀다
그대의 부친은
우리 황해도에서 문장으로 날고뛴다는 삼비팔주(三飛八走) 가운데서도
삼비의 으뜸으로 이름을 떨치고 계시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토록 학문을 등한히 하는가? 장차 무식한 하등인간이 되어 그대 한 몸과 가문을 아울러 욕되게 하려고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고 있는가?"
그러자 중근이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었다.
자네들의 말도 옳다. 하지만 내 말도 들어보게.
옛날 초패왕 항우는 글 공부란 이름만 적을 줄 알면 된다고 했다. 그랬는데도 만고영웅으로서
초패왕의 큰 이름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초패왕 저가 장부라면, 나도 장부다. 초패왕에게서 이루어졌던 일이 어찌 내게서는 아니 된단 말인가. 자네들은
이제 두 번 다시 구구한 말로 내게 학업을 권면하려 들지 말라.
그 자리에 있던 중근의 벗들과 동문은 한결같이 그 말을 터무니없는 허풍이거나 젊은 날을 사냥과 호기로 떠돌며 즐길 구실이거니 여겼다. 그러나 그때 벌써 중근은 학문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처참한 난세의 예감을 그렇게 드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산길이 끝나면서 중근이 탄 말은 저만치 천봉산이 보이는 큰길로 접어들었다. 일본
사람들이 연 신작로보다는 못해도 우마차가 스쳐 지나갈 만큼은 넓고 고른 길이었다. 산등성이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맨살을 드러낸 천봉산의 바위 능선이 자주색 닭의 벼슬처럼 펼쳐져 야릇한 영기(靈氣)를 뿜어내는 듯했다. 문득 이태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중근의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니라. 지기(地氣)와 산세가
이만한데 내 자손 가운데서 인물이 아니 나올 수 있겠느냐?
열두 살 때인가, 중근의 손을 잡고 마을을 거닐다가 천봉산이 그날처럼 자줏빛으로 펼쳐지는
것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그때는 별 뜻 모르고 들어 넘긴 말이 그날에 와서야 느닷없는 감동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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